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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데스크 해자 (표준, 생태계, 락인)

by 매너남자 2025. 12. 29.

오토데스크의 핵심 사업 건축 설계에 대한 이미지

CAD·BIM을 업무로 쓰시는 건축·설계 실무자, 그리고 ‘건축·시공 디지털화’ 흐름에 관심 있는 투자자 분들이 계십니다. 단순히 “오토데스크가 유명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왜 Autodesk(ADSK)가 쉽게 밀려나지 않는지, 그 버팀목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차분히 짚어보는 데 있습니다. 업계에서는 종종 소프트웨어를 ‘도구’라고 부르지만, 막상 현장에 들어가 보면 도구가 아니라 ‘규칙’에 가깝습니다. 어떤 파일로 납품해야 하는지, 협업을 어떻게 돌리는지, 검토와 승인 절차를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지까지 좌우하니까요. 그래서 표준, 생태계, 락인이라는 세 단어로 오토데스크의 해자를 풀어보겠습니다. 다만 이 글은 투자 조언이 아니라, 판단을 돕기 위한 구조 정리라는 점도 함께 말씀드립니다.

표준: 결과물의 형식이 곧 시장의 문법이 됩니다

오토데스크의 힘은 “잘 만든 기능”보다 한 단계 바깥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계 업계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만들었는가’만이 아니라, ‘상대가 그 결과물을 얼마나 무리 없이 읽고, 수정하고, 검증할 수 있는가’입니다. 도면은 결국 전달물이고, BIM 모델은 더 큰 의미의 전달물입니다. 전달물이 표준 형식으로 굳어지면, 그 순간부터 표준은 언어가 됩니다. 모두가 같은 언어로 말하면 회의가 짧아지고, 검토가 빨라지고, 책임 소재도 덜 흔들립니다. 반대로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면, 사소한 오해가 커다란 비용으로 번지기 쉽습니다. 특히 공공 발주나 대형 프로젝트에서는 “어떤 형식으로 제출하라”는 요구가 명시되는 일이 많습니다. 제출 형식이 정해지는 순간, 선택지는 실무에서 크게 줄어듭니다. 팀 내부에서 새로운 툴을 시험해 보고 싶어도, 납품 단계에서 되돌아가야 할 가능성이 보이면 대부분은 보수적으로 움직입니다. 그 보수성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건축·시공은 한 번의 오류가 공정 지연과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산업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표준은 채용과 교육으로도 이어집니다. 회사가 특정 툴을 중심으로 업무를 설계하면, 새로 들어온 분들도 그 툴을 기준으로 익힐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 자료, 사내 템플릿, 검토 체크리스트, 산출물 규칙이 모두 그 표준을 전제로 만들어지니까요. 시간이 쌓이면, “우리 팀이 잘하는 방식” 자체가 특정 툴을 기반으로 굳어집니다. 그러면 경쟁 제품이 조금 더 싸거나, 특정 기능이 더 좋아도 쉽게 이동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신입으로 프로젝트에 투입됐을 때입니다. 저는 도면을 더 빠르게 뽑을 수 있다는 이유로 다른 CAD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중간 검토 날이 다가오자 선배가 조용히 말하셨습니다. “네가 뽑은 파일이 열리긴 열리는데, 선이 깨지고 치수가 틀어지면 그 책임은 누가 질래?” 그 한마디가 꽤 현실적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표준 형식으로 다시 정리했고, 그 과정에서 ‘기능의 우위’보다 ‘호환의 안전’이 더 큰 가치로 작동한다는 걸 체감했습니다. 표준이란, 그래서 시장의 문법입니다. 문법을 바꾸려면 개인의 의지보다 훨씬 큰 합의가 필요합니다.

생태계: 플러그인보다 무서운 건 ‘축적된 습관’입니다

표준이 “입장권”이라면, 생태계는 “도시에 깔린 도로망”에 가깝습니다. 도로망이 촘촘하면 자동차 한 대를 바꾸는 일은 쉬워도, 도시 자체를 옮기는 일은 어렵습니다. 오토데스크 주변에는 단순한 플러그인 목록을 넘어, 실무에서 당장 써먹는 템플릿, 패밀리(라이브러리), 자동화 스크립트, 교육 커리큘럼, 외주 인력 풀, 커뮤니티 지식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이 축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러움’으로 변합니다. 누구도 문서로 정리하지 않았는데도, 팀원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작업하고, 비슷한 위치에 파일을 두고, 비슷한 규칙으로 검토하는 상태가 됩니다. BIM을 예로 들면, 모델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속성 값이 일관되게 들어가 있는지, 물량 산출 규칙이 맞는지, 협력사 모델과 좌표가 어긋나지 않는지 같은 것들이지요. 이때 생태계는 ‘검증의 속도’를 끌어올립니다. 이미 업계에 널리 쓰이는 체크 방식이 있고, 그것을 자동화하는 방법이 공유되어 있으며, 익숙한 사람을 구하기도 쉽습니다. 협업 도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파일을 주고받는 수준을 넘어, 코멘트와 이슈 트래킹, 승인 기록을 남기는 습관이 정착하면 프로젝트 운영이 달라집니다. 운영이 달라지면, 그 위에 붙는 도구도 달라지고, 다시 운영이 더 고도화됩니다. 생태계의 또 다른 힘은 ‘연결’입니다. 오토데스크 제품군은 설계에서 끝나지 않고, 검토·조정·문서 관리·시공 협업 같은 후방 단계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한 단계에서 편해지면 다음 단계도 같은 방식으로 맞추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입니다. 결국 제품 하나의 만족이 아니라, “업무 흐름 전체가 매끄럽게 굴러가는 느낌”이 고객 경험으로 남습니다. 제가 소규모 설계팀에서 BIM을 처음 제대로 써봤을 때입니다. 초반에는 모델링 자체가 어려워서 매일 헤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배가 예전 프로젝트에서 쓰던 패밀리 라이브러리와 템플릿을 건네주셨습니다. 창호 태그가 자동으로 맞춰지고, 도면 스타일이 통일되며, 산출 표가 빠르게 정리되는 걸 보니 속이 시원하더군요. 저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툴을 쓰는 게 아니라, 축적된 습관 위에 올라타는 거구나.” 그 습관이 회사에, 협력사에, 교육 과정에 퍼져 있다면 생태계는 더 단단해집니다. 그리고 그 단단함이 곧 해자입니다.

락인: ‘바꾸기 싫음’이 아니라 ‘바꾸기 무서움’이 됩니다

락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종종 부정적인 뉘앙스를 떠올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무에서 락인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리스크 관리의 문제인 경우가 많습니다. 소프트웨어를 교체한다는 것은 버튼 위치가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업무의 기준점이 바뀌는 일입니다. 파일 구조, 템플릿, 권한 체계, 검토 루틴, 산출 기준, 교육 방식이 함께 흔들립니다. 더 현실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협력사와 주고받는 파일 호환, 과거 프로젝트 자료의 재활용, 발주처의 요구 형식이 얽혀 있으면, 교체는 ‘결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체는 프로젝트 일정표 위에 올라가는 작업이 됩니다. 이 지점에서 구독형 모델은 오토데스크에게 유리하게 작동합니다. 구독은 매년 비용이 나가지만, 그만큼 업데이트와 지원, 계정·권한 관리, 협업 기능을 계속 유지합니다. 팀 단위로 굴러가는 업무에서는 “누군가만 끊는 선택”이 오히려 더 위험해질 때가 있습니다. 특정 인원이 버전을 못 맞추거나, 협업 공간 접근이 끊기면, 작은 구멍이 전체 일정에 영향을 주기도 하니까요. 결국 고객은 비용을 줄이려다가 더 큰 비용을 치를 수 있다는 두려움을 계산하게 됩니다. 이 계산이 반복되면, 구독은 ‘선택’에서 ‘기본값’으로 바뀝니다. 물론 락인은 언제든 반감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가격 정책이 과도하게 느껴지거나, 제품 구성 변화로 “필요 없는 것까지 사야 한다”는 인식이 커지면 신뢰가 흔들립니다. 그래서 락인을 해자라고 말할 때는, 고객이 납득할 수 있는 가치 제공이 함께 굴러가야 한다는 전제가 붙습니다. 해자가 깊다고 해서 마음 놓을 수는 없고, 해자가 깊기 때문에 오히려 고객 경험 관리가 중요해집니다. 제가 어느 회사에서 툴 교체 TF를 맡았습니다. 초기에는 “라이선스 비용이 줄어든다”는 숫자가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파일 변환 테스트를 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템플릿이 깨지고, 뷰 규칙이 달라지고, 도면 표기가 미묘하게 달라져 검토자가 다시 확인해야 했습니다. 교육 일정도 잡아야 했고, 그 기간 동안 생산성이 떨어질 게 뻔했습니다. 결국 저는 보고서 마지막 장에 이렇게 썼을 것 같습니다. “절감액보다, 일정·품질 리스크가 더 크다.” 락인이란 그래서 ‘귀찮음’이 아니라 ‘업무 리스크의 무게’로 만들어집니다.

 

오토데스크의 해자는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 어렵습니다. 표준이라는 문법이 먼저 길을 닦고, 그 위에 생태계라는 도로망이 촘촘히 깔리며, 마지막으로 락인이라는 리스크 계산이 고객의 선택을 고정시킵니다. 건축·설계 디지털화가 깊어질수록 프로젝트는 더 데이터 중심으로 흐르고, 협업은 더 촘촘해지며, 실수의 비용은 더 커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조금 더 싼 대안”보다 “안전하게 굴러가는 체계”가 선호되기 쉽습니다. 만약 ADSK를 투자 관점에서 보신다면, 단순 실적 숫자만이 아니라 고객이 체감하는 가치(협업 편의, 검토 안정성, 교육·채용의 용이성)가 유지되는지 함께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실무자라면, 지금 쓰는 툴이 아니라 ‘우리 팀의 업무 습관’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 점검해 보시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